언론자료<한겨레> 해직기자로 ‘한겨레’ 창간 이끌고, 남북 민간교류 물꼬

동아일보 해직 뒤 언론자유 운동 매진
국민주 신문 ‘한겨레’ 창간·안착 기여
99년 이후 남북민간교류 활동 전념
말년에 언어장애에도 자유언론 운동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

 

15일 79세로 별세한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사 대표이사는 평생을 자유언론 운동과 남북교류에 바친 삶으로 일관했다.


고은 시인이 <만인보>에서 그를 “두꺼운 손바닥이 어둠이었고 신뢰였다”고 노래한 것처럼 고인은 넉넉한 인품으로 쌓은 신뢰로 자유언론과 민간 남북교류 운동의 틀을 다졌다.

 1941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7년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기자 초년병 시절 그는 사회부 기자로 탄광촌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조건을 파헤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3선개헌을 강행하며 강권 통치로 나아가자 그는 동아일보 동료 기자들과 함께 언론자유 수호 투쟁에 나섰다. 이 싸움의 주축에 그와 동아일보 수습기자 10기 동기생들이 앞장섰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 투쟁을 벌이자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광고 게재를 방해해 광고 없는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다. 이에 시민들은 호주머니 돈을 털어 기자들의 투쟁을 성원하는 격려 광고를 내주었다. 1975년 3월 17일 새벽 편집국에서 농성하던 기자 150여 명은 폭력배들에 내몰려 차가운 거리로 쫓겨났다. 그를 포함한 수습 10기 17명이 포함됐다. 나머지 10기 3명도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집권 때 해직됐다. 10기 20명이 모두 해직됐지만, 나중에 그를 포함해 5명이 언론사 대표를 지냈다. 해직 기자에서 한국 언론의 중추로 우뚝 선 것이다.

그가 동아 해직기자들과 함께 조직한 ‘동아일보 자유언론투쟁위원회’는 언론자유뿐 아니라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의 중요한 기지가 됐다. 정권은 그를 포함해 많은 동아투위 및 조선투위 구성원들에게 고위직 감투를 제시하며 회유하려 했으나 해직기자들은 거리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동아투위 활동 중에 인문사회과학 출판사 ‘청람’을 창업해, 사회 민주화와 개혁을 위한 책들을 펴냈다. 권근술의 거리 인생은 1988년 한국 최초의 국민주 신문 <한겨레>가 창간되며 결실을 보았다. 1987년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 수립이 실패하자, 시민들은 송건호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 해직기자가 주도한 <한겨레> 창간에 50억 원을 모아줬다. 그는 <한겨레> 창간에 처음부터 참여해 편집권 독립 등의 원칙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창간 이후 편집위원장, 논설주간을 거쳐 1995년부터 4년 동안 대표이사를 지냈다.

대표이사 시절 외환위기가 한국을 강타해 무수한 기업들이 도산했지만, 그가 키를 잡은 한겨레는 흑자를 내는 등 선전했다. 광고 시장에서 한겨레 위상이 올라간 영향이 컸다. 여기엔 그가 두터운 인간관계로 다진 광고주와의 신뢰가 톡톡한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영화 주간지 <씨네21> 창간(1995)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설립(1996)도 이끌었다. 정부, 언론, 시민단체의 3자 협력 모델의 모범인 ‘실업극복국민운동’ 캠페인을 벌였고 남북교류 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대표이사 퇴임 뒤에는 남북 민간교류 단체 ‘어린이어깨동무’(98년 설립) 활동에 전념했다. 이 단체는 2001년 평양에 콩우유 공장을 세웠다. 2010년 이후 건강 악화로 어깨동무 이사장 등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동아일보 입사 50주년이던 2017년에 동기들과 1인시위를 하고 ‘늙은 기자’들의 마지막 절절함을 <한겨레>에 털어놓았다.

“어느 회사에서 입사 이후 50년 동안 입사 동기가 결속을 유지해, 50주년 기념행사를 하는 사례가 있었을까요? 그 원동력은…그 긴 세월의 좌절과 시련에도 가시지 않는 자유언론에의 타는 목마름이었습니다…우리들의 청운의 꿈은 너덜너덜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제발 앞으로는 ‘해직기자’라는 소리 좀 들리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소.” (<한겨레> 2017년 11월13일)

뇌일혈로 인한 언어장애를 겪으면서 태운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래서 고은 시인은 이처럼 그를 평가한 것 같다.

“도무지 그 거창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좀더 큰 일 좀더 굵직한 일/ 아니면/ 좀더 먼 데까지 차지해야 할 포부가…// 속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 있어도/ 꾹 참아/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고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웃음이 아니었다.”(<만인보> 중 4권 ‘권근술’) 18일 오전 8시 발인 뒤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오전 9시 30분 추도식을 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obituary/932704.html#csidxec15e04d97eaf76954f60bf8719d9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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